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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데
1999-10-14 (Thu) 전대환 [2004-09-28 00:53]
전대환 내일신문
몇 일 전 어떤 회의에 참여한 일이 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1년에 두 차례씩 모이는, 직책상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당면 안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불참하는 일도 적고, 일단 모이면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틀간 계속되는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는 역시 개회 의식이다. 삼삼오오 모여들어 개회식이 끝나면 다음 회의가 시작되기까지 약 30분간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마련된다. 20대의 젊은이들로부터 80대의 어르신들까지 서로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나누고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여기서 문제에 부딪친다. 어르신들부터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리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순서가 지나가면 그 때부터는 마주치는 대로 선배님들과 동년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처음 약 2~30명쯤까지는 그런 대로 잘 진행되다가 그 다음부터 ‘저 분께 인사를 드렸던가?’ 하며 헛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사를 드렸던 분에게 다시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실례도 없지 않은가.
이런 때 사람들의 손에 모두 아이디 칩이 부착되어 있어서 악수를 하는 대로 자동으로 기록되고, 점멸 램프로 악수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서 표시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손을 휴대폰에 갖다 대면 집에 있는 메인 컴퓨터의 업무일지에 그 날 만난 사람들이 모두 기록된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는 공상을 하게 된다.
이건 아마 모든 일에 기록을 남기고싶어 하는 나의 괴벽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인간성이 모자란 발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기록을 철저히 남기는 일은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이름은 어떻게 해서 남겨지는가. 기록에 의해서다. 그러기에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족보에 올리고, 사람이 죽으면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던가.
최근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때 미군이 저지른 과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런 일들이 한국인의 기록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 측의 기록이 공개되면서 공론화 되기 시작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미국은 기회가 닿는 대로 기록 남기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군대가 몇 사람만 파견돼도 반드시 거기에 기록 요원을 배치하고,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일에 대해서가지 꼼꼼히 기록을 챙기는 극성스런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8.15 해방 직후 남북한의 방송 내용도 우리 나라에는 없는데, 미국에는 존재할 뿐만 아니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면 그야말로 자질구레한 남의 나라 일들까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런 것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으로 초강력 파워를 과시하는 한 요인이 아닐까. 미래를 위해서 우리도 좀더 기록 관리에 적극성을 보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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