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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

가을과 겨울

1996-12-04 (Wed)

전대환 [2004-09-28 00:41]

전대환

내일신문

“봄 사돈은 꿈에 볼까 무섭다”고 할 정도로 우리 조상들은 봄을 무서워했다. 그리고 길고 긴 하루해의 여름은 노동의 계절이었다. 그러나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가을은 그런 대로 괜찮은 시절이었다. “가을비는 장인 영감 턱 밑에서도 피한다”고 할만큼, 비도 적당, 바람도 적당, 기온도 적당, 사람에게 가장 쾌적한 시기가 가을일 것이다. 그런데,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또 준비돼 있으니 마냥 좋다는 타령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계절이 또한 가을이다. 가을과 겨울,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들이다.

푸른 하늘, 맑은 물,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산, 곡식이 가득한 광, 고고한 자태의 꽃들로 가득한 정원, 흐드러지게 들꽃으로 덮인 오솔길... 어디를 가도 절경(絶景)이요 오나가나 찬란한 계절이다. 설탕도 크림도 안 넣은 쓴 코오피도 따뜻하게 데워 마시면 제법 맛을 느낄 수 있고, 평소에 마음은 있으나 그렇게 절실하지는 않던 옛 얼굴들도 새삼 보고싶어진다. 옛 애인이라도 있던 이들이라면, 길거리에서라도 우연히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을 요즈음이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가을이 짧은 안타까움이다. 푸른 하늘도 가고 맑은 물도 얼고 꽃들도 시들고 가난한 집 광의 쌀독은 어느 새 비어 간다. 그러나 계절은 돌고 돈다는 것이 한 가닥 희망이기도 하다.

아직 여리지만 모든 면에서 새롭고 신선한 사춘기(思春期)를 인생의 봄이라고 한다면,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춘궁(春窮)의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그래도 봄이니까 좋은 시절이다. 장년기의 여름은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버티어야 하는, 삶의 뜨거움과 고습(高濕)의 스트레스를 겪는 시절이다. 봄여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은 사람도 있을 터이고, 열심히 일은 안 했지만 물려받은 땅이 많아서 남의 힘으로 쌀독이 가득한 노년(老年)의 가을을 맞이하는 팔자 좋은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겨울이 한 번만 있을 뿐 다시 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조물주의 공평함인 데는 누구도 할 말이 없다.

계절에서 가장 바쁜 때가 가을이라면 역사가 있은 이래 요즈음이 가장 바삐 움직이는 세상이니, 지금이 역사(歷史)의 가을이라고 하면 억측일까. 이른바 사이비(似而非) 종파들이 말세(末世)를 빌미로 수지 맞추는 일이 20세기 들어서 가장 빈번하다. 공교롭게도 예수는 말세를 떠드는 이단(異端)이 도처에서 나타나면 그 때가 진정 말세이리라고 하셨다. 역사의 종국을 생각하는 일을 무리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환경 오염, 자원 고갈, 핵의 위협 등 지구의 여건이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나 신천신지론(新天新地論)도 그렇고, 윤회론(輪廻論)도 그렇고 대부분의 종교에서 역사의 지속성을 보장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역사의 가을에는 신심(信心)이 문제일 것 같다.

전대환(구미안디옥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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