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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세상
"와!"
군중들이 환성을 질렀다.
―깡.
"인저 고부 천지는 우리 세상이 되어부렀은게, 이놈의 동헌인가 도적놈 적굴인가, 이놈의 집구석에 조뱅갑이같은 잡귀가 다시는 두 번 다시 얼씬도 못허게 열에 열발, 열에 열손으로 그 잡귀들을 밟고 이기고, 열에 열채로 사정없이 두들기고 패고 박고 치는디, 자, 쳐라!"
―깨갱깽 깽깽 깨갱깽 깽깽.
(중략)
그 때 손에 풍물을 들지 않은 젊은이 하나가 풍물판으로 뛰어들어 버꾸패 뒤를 따라 풍물판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는 곰배팔이 설만두였다... 평소에는 세상 사람들 눈에 제 병신 꼴이 부끄러워 잔뜩 옥죄고만 살았을 것 같은데, 여태 그 옥죄었던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오그라붙은 왼쪽 팔까지 익살스럽게 놀려대며 휘젓고 다녔다...
"김판돌이, 너도 이리 나와."
설만두는 젊은이 하나를 판으로 끌어당겼다. 절름발이었다... 그는 설만두한테 끌려 억지로 억지로 판을 한 바퀴 돌고 나더니 설만두가 얼굴에 숯검정을 쓱 문질러주고 나서는 그도 이내 흥이 나고 말았다. 절름거리는 다리까지 익살스럽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설만두는 더 흥이 나서 제 병신 팔을 더욱 익살스럽게 내둘렀다. 이내 둘이 짝을 지어 제대로 어우러졌다. 그들은 신명이 나서 제 병신 팔과 다리를 더 크게 놀려 병신스러움을 있는대로 과장하며 판을 휘갈기고 다녔다. 구경꾼들은 배를 쥐고 웃었다. 그렇게 휘젓고 다니자 평소에 볼썽사넙던 그들의 병신 꼴이 그게 처음부터 저렇게 이런 풍물판에 맞춰 생겨났던 것같이 구색이 맞았다.
송기숙씨가 쓴 장편소설 <녹두장군>에 나오는 한 대목으로서, 농민군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군아를 점령한 후 풍물패를 앞세우고 신나게 한 판 노는 장면이다. 여기서 소설 지은이가 다음과 같이 덧붙인 평(評)이 퍽 인상적이다.
설만두와 김판돌이가 풍물판에 어우러지자 풍물판은 한껏 더 신명이 났다. 사람이 원래 제 생긴 대로는 모두가 저렇게들 허물없이 얼려 살았으리라 싶었다. 참신은 참신대로 제 솜씨에 맞춰 흥이 나고, 병신은 병신대로 부끄럼 없이 제 생긴 대로 흥이 나고, 모두 제 구색대로 제 흥에 겨워 저렇게 한 덩어리로 얼려 살았을 것 같았다.
신명이 난 풍물 판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따로 없었다. 제 생긴 대로, 제 구색대로 한 덩어리로 어울려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이 본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었을 터이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아닐까.
컴퓨터와의 인연
초등학교 시절, 형님이 월남에서 귀국할 때 사가지고 온 구식 소니(SONY) 녹음기에 눈독을 잔뜩 들이고 있다가, 형님이 취직을 해서 집을 떠나자마자 드라이버를 들고 그놈을 풀어헤쳤던 적이 있다. 내가 쓰던 다락방에 틀어박혀 어른들이 아실까봐 숨죽이며 다시 조립을 하려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녹음기에서 자기 목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를 신기하게 생각했던 시절인지라, 초등학생인 나로서는 녹음기의 원리가 무엇인지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사전지식이 전혀 없던 터였으므로 그걸 다시 조립해내는 일이 어찌 가당하기나 했을까. 그놈을 보따리에 싸서 몇 군데의 소리사를 싸돌아다니면서 조언을 얻어 겨우 조립을 해 놓고 녹음 재생 테스트에 성공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청계천에 8비트 컴퓨터가 나돌던 시절, 어려서부터 그렇게 겁없던 내가 좀이 쑤시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컴퓨터를 하나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갓 결혼한 아내를 꼬드겨서 드디어 8비트 컴퓨터를 손에 넣게 되었다.
약 2년만에 8비트 시절은 가고, 전혀 다른 모습의 컴퓨터인 286 AT가 등장했을 때 다시 한 번 거금을 투자하여 새 컴퓨터를 구입한 후에는 다시는 새 컴퓨터를 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쓰는 컴퓨터는 초고성능 컴퓨터로 변했다. 10여 년 동안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교체해 오는 동안 옛 부품들은 종적을 감추고 당시 컴퓨터에서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키보드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내 컴퓨터는 셀 수도 없이 수술대에 오르느라고 뚜껑이 닫혀 있을 때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는 사이 컴퓨터 보급이 점차 확산되면서 동료 목회자들을 비롯하여 주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집은 컴퓨터 수리센터가 되다시피 했다. 컴퓨터 관련 전화 상담은 말할 것도 없고, 아는 이들의 부탁으로 컴퓨터를 조립해 준 것만도 100대가 넘게 되었다.
컴두리센터
이러는 동안, 자고로 목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거늘 '내가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되어, 컴퓨터 수렁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내 혼자서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고 집사(?)들을 세워 서비스를 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이른바 자원봉사자들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자원봉사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목사 신분을 가진 개인으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의 몇몇 사람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미디어봉사회 컴두리센터>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었다. 컴퓨터를 두루두루 나누어 잘 활용하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사무실을 마련하고 컴퓨터 등 집기들을 준비하고 사무직원까지 한 사람 쓰고 하느라고 자금이 수월찮게 들었지만 뜻밖의 협조로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주 자금원인 이사회를 구성하고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자원봉사자 몇 사람을 확보하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일을 하는 단체가 처음인지라, 지역 신문과 방송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의 일간지들과 방송사들까지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해 갔고, 1996년 말 KBS 1TV에서 컴두리센터가 소개된 이후 우리 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더 바빠지게 되었다.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한답시고 일을 별여 놓은 것이 도리어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최근에 컴퓨터를 곧잘 다루는 자원봉사자들을 보내 주셔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자기들끼리 잘 어울려 공부를 하며 컴퓨터 수리도 하고 당번을 정하여 장애인들의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이 정착되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동세상에의 꿈
컴두리센터 일과 관련하여 이제야 '장애인'이란 말이 나왔는데, 컴두리센터는 장애인을 위한 봉사단체이다. 장애인에게 무료로 컴퓨터를 나누어주고, 쓰다가 고장이 나면 찾아가서 고쳐 주고, 사용법을 잘 모르면 자원봉사자가 달려가서 교육까지 시켜 준다. 그러나 '장애인'이란 말도, '위한다'는 말도, '봉사한다'는 말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짧은 말로 컴두리센터를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는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관련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할 때, 우리 일의 대상자는 '컴퓨터가 불편한 지체(肢體)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해 줄 수 있는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다리가 불편하여 바깥출입이 어려운 사람이 컴퓨터 통신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컴퓨터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지체이고,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컴퓨터를 통하여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컴퓨터는 그 사람의 눈 역할을 일부분 담당하는 지체이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컴퓨터를 통하여 음성 신호를 문자나 그래픽으로 변환하여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컴퓨터는 귀의 역할을 하는 지체이다. 지능지수가 떨어져 정신지체아로 분류되는 사람이 컴퓨터를 통해 반복학습의 효과를 올릴 수 있다면 비록 뇌 속에 컴퓨터 칩을 내장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컴퓨터가 뇌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담당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컴퓨터가 이런 사람들의 지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부추기는 일을 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 저녁 10시에 천리안의 컴두리 방(CUG)에서는 정기 채팅이 있는데, 이 자리에는 앞을 전혀 못 보는 시각장애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인,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바깥에 나다니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겉으로는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다. 서두의 녹두장군 이야기에서 장애인들이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농민군들과 어울려 마음껏 노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컴퓨터가 얼굴에 칠한 숯검정의 역할을 하여 이 자리가 벽 없는 자리일 수도 있었지만, 이런 식의 만남이 지속된 결과 이제는 컴퓨터라는 숯검정을 칠하지 않고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전혀 부담 없는 사이가 되었다. 설만두와 김판돌이가 그렇게 신나게 어우러진 이후 숯검정을 칠하지 않고서도 동네를 버젓이 다니면서 누구하고도 거리낌없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서른 다섯 평밖에 안 되는 조그만 우리 교회를 막아 만든 컴두리센터 사무실에는 요즈음 이른바 장애인들이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린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물론 교회와 담쌓고 사는 비장애인들도 그들 못지 않게 찾아온다. 매일같이 점심 밥 해대느라고 수고하는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 식탁에서는 그 누구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여 생각한다거나, 함께 밥 먹는 사람들이 한 식구(食口)가 아니라고 여기지 않는다.
지난 해 연말에는 교회 강단을 무대 삼아 좁은 공간에 4~50명 정도가 빠글빠글 복작거리는 가운데 조촐한 송년 모임을 가졌는데, 참 재미있는 자리였다. 휠체어 탄 친구가 사회를 맡아 장애인 비장애인 가리지 않고 이사람 저사람 불러내어 노래를 시키며 흥을 돋군 후 음식을 나누어 먹고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합창을 하며 그 자리를 마무리했다. 장애인 단체나 모임에 여러 차례 가 보았지만, 이렇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흉허물없이 어우러지는 자리는 보지 못했다. 여기서 대동세상의 가능성을 논한다면 지나친 망상일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적으로 지체장애를 치료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불편함을 컴퓨터라는 도구로 어느 정도 덜어줄 수 있다는 데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작은 보람을 가진다.
(한국신학연구소 발행, <살림> 199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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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1-01 (Thu)
전대환 [2004-09-27 22:04]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