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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환 칼럼] 기억력의 한계
[전대환 칼럼] 기억력의 한계
2015-06-29 (Mon) 마을지기 [2015-06-29 16:55]
전대환 석간내일신문
[전대환 칼럼] 기억력의 한계
전대환(전 구미YMCA 이사장 | 한울교회 목사)
2015-06-29 11:34:31 게재
컴퓨터 저장장치에 기억시켜놓은 것들은 사람이 삭제하거나 장치에 물리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는다. 출력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임시로 저장되는 내용들은 대체로 오래된 것들부터 제거되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 시스템은 좀 다른 것 같다.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오래된 기억보다는 최근 기억부터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의 경우 프로그래머 또는 설계자가 설정을 해놓지 않으면 처음 데이터나 나중 데이터나 차별 없이 받아들이지만 사람의 뇌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을 강하게 새겨두는 것 같다. 누군가를 붙잡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물어보면 기억해내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거의 예외 없이 즉시 기억해 낸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요즘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공교육을 받기 시작한 세대라면 거의 그럴 것이다.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나의 기억 속에는 일곱살 때 처음으로 짜장면을 먹던 장면조차 선명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최근에 언제 짜장면을 먹었는지, 그것은 깨알같이 입력해놓은 나의 생활기록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보면 나올지 몰라도 그냥은 기억하지 못한다. 굳이 간직해서 용량을 차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뇌에서 증발했을 것이다. 그건 전혀 아깝지도 않고 아쉬울 것도 없다.
중요한 기억 위해 잘 잊어버리는 것
잘 나가는 직장에서 고급정보를 다루는 커리어우면도 건망증 때문에 버스나 택시에 우산을 두고 내릴 수 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대학교수도 퇴근길에 마트 들러서 두부 사오는 것을 잊어버려서 아내의 핀잔을 들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잊어버림' 때문에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것을 기억하기 위한 몸의 자구책일 수 있다.
사람의 두뇌기능은 그 한계가 상상을 초월하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일생동안 사용하는 비율이 극히 낮다고 말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제한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무한정으로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불필요한 것을 많이 기억하고 있으면 뇌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기억을 관리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크다.
최근 우리나라 문단에서 내로라하는 유명작가가 표절 문제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의 주요작품 가운데에 일본 작가의 글을 자기 생각인 양 갖다 쓴 부분이 있다는 것인데, 처음에 출판사 쪽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응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고, 급기야 작가 자신이 나섰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우국'은 1961년에 나온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신경숙 작가가 스스로 밝힌 심경이다.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라는 말은 백 번 옳다. 다만 '이제는 그런 상황이 됐다'가 아니고 '원래 그랬다'고 했으면 더 정확한 표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사실이다. 작가라면 적어도 일반인보다는 책을 많이 읽을 터이고,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그걸 다 기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기억'을 뒤져볼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봤어야 했다.
먼저 데이터베이스 검색했어야
50대 작가에게 '왜 그동안 읽은 책을 체계적으로 입력해두지 않고 기억 속에만 담아두고 있소?' 하고 묻는 것이 억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검색'이라는 첨단무기를 동원해서 공격해오는 것을 '기억'이라는 재래식 무기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신경숙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쓴 글은 물론 그동안 읽은 책의 기본정보와 밑줄을 그어야 할 내용들을 차곡차곡 입력해서 필요할 때 수시로 검색할 수 있도록 저장해두어야 한다.
안도현 시인의 말마따나 이 기회에 우리는 스스로 '자기표절'은 없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남의 글과 함께 내가 쓴 글까지 셀 수도 없이 검색을 하고 있다. 나의 기억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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